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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는 미래의 서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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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 년 동안 마크 다니엘 멀로우니와 그의 가족은 “세계를 연결하는 로타리”를 몸소 보여주는 삶을 살았다. 자신을 ‘즐거운 여행자’라고 부르는 그는 이제 인생 여정의 다음 장을 열게 되었다. 국제로타리 신임 회장으로 봉사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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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를 2주 남겨두고 앨라배마 북부에 있는 디케이터 로타리클럽은 파티 분위기로 가득하다. 지난 토요일 스톤리버 교회의 교인들과 함께 디케이터 로타리클럽 회원들은 70명 이상의 아동들에게 팬케이크 아침식사와 타겟에서의 쇼핑 기회를 제공했다. 클럽의 월요일 모임이 열리는 지금 오스틴 중학교 재즈밴드가 “산타 베이비,” “펠리스 나비다” 등의 캐롤을 연주한다.  “Baby, It’s Cold Outside”의 노래도 울려 퍼지지만 12월 초인데도 기온은 섭씨 4도 정도까지 올라가 훈훈한 기운도 든다.    

밴드가 연주를 마치자 클럽 회장 래리 페인(Larry Payne)이 “누가 찾는 건 아니지만, 마크는 도대체 어디 있는 건가요?”라고 말하자 청중은 애정이 담긴 야유를 보낸다. ‘화제의 주인공’이 앞으로 나와 자랑스럽게 외친다. “앨라배마주의 마크 멀로우니 입니다!” 120여 명의 사람들은 맹렬히 환호한다. 환영 음악이 연주된다.

앨라배마주 디케이터의 집에서의 게이와 마크 멀로우니 부부. 벽난로 위로 보이는 게이의 그림은 잉글랜드 코츠월드 캐슬쿰의 다리 위에 서있는 마크의 모습을 담고 있다. 

Photograph by Cary Norton

로타리가 후원한 쇼핑 이벤트를 보도한 <디케이터 데일리>는 멀로우니의 말을 인용하며 그를 ‘클럽 회원’으로 소개했다. 물론 이 표현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가 지금까지 이룬 의미 있는 성과를 아우르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설명이었다. 로타리에 1980년 입회한 멀로우니는 (그의 경력은 매우 다양하지만 일부만 언급하면) 지구총재, RI 이사, RI 회장 에이드, 재단 이사, 규정심의회 의장, 2014년 시드니 국제대회 위원장을 지냈다. 이 모든 경험은 그가 새롭게 맡은 리더 역할인 국제로타리 회장이 되기까지의 서막이었다. 

“그는 RI 회장이 될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멀로우니를 거의 40년 간 알아온 빌 와이커(Bill Wyker)가 말한다. “그는 의사소통에 뛰어나며 훌륭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 자상하며 사람들을 잘 돌보기도 한다. 모든 자질을 다 갖추었다는 의미다. 그가 최정상까지 올라갔다고 해도 우리 클럽에서 놀랄 사람은 아무도 없다.” 

1986년 멀로우니 뒤를 이어 디케이터 클럽 회장이 된 와이커는 자신이 멀로우니를 유쾌하게 놀리는 클럽 전통을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우리 클럽에서 ‘마크를 괴롭히는 문화’는 내가 시작했으며 아직까지도 활발하게 이어지고 있다”고 그가 말한다. “그리고 마크는 이를 받아주었을 뿐만 아니라 부추기기도 했다. 이것이 그의 스타일이다. 우리 클럽도 이 전통을 사랑한다. 물론 그 사람을 정말 사랑하고 존경해야만 그런 식으로 장난치는 일이 가능하다.”

12월 클럽 모임의 강단에서 멀로우니는 자신을 “가장 즐거운 여행자”라고 하며 그가 그 동안 도대체 어디 있었는지를 설명한다. 여행은 “네바다와 캘리포니아를 거쳐 동쪽으로 향하면서” 시작되었고 잉글랜드, 인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대만을 거쳐 마침내 디케이터로 비행기를 타고 돌아왔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가 이 특정 장소와 시간으로 오기까지는 오래 전 길고 긴 여정이 존재했다. 비행기의 탄생도 100년을 앞둔 오래 전의 일이다. 

대서양 건너편에서 아서 멀로우니(Arthur Maloney)와 캐서린 멀로우니(Catherine Maloney)는 세 아이를 잘 먹이고 풍요로운 농지에 터전을 잡기 위해 1949년 대기근에 휩싸인 아일랜드를 떠나 미국으로 향한 배에 올랐다. (부부는 첫째와 둘째는 두고 떠나야 했는데, 그 중 한 명은 영영 재회하지 못했다.) 뉴올리언스에 도착한 그들은 북쪽으로 이동한 후 일리노이주 남부 갤러틴 카운티에 이르렀다. 가족은 아일랜드 출신 가톨릭 이민자들이 살고 있던 폰드세틀먼트라는 곳에 정착했다. 

  

 

“그는 의사소통에 뛰어나며 훌륭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 자상하며 사람들을 잘 돌보기도 한다. 모든 자질을 다 갖추었다는 의미다.”

마크 다니엘 멀로우니는 그로부터 106년 후인 1955년 5월 14일에 태어났다. 그 시기 리지웨이라는 작은 마을 외곽에 위치한 가족 농장은 약 5,000평방미터로 커져 있었다.  수십 년간 멀로우니 가족은 소와 키우고 사료 작물을 재배했지만 패트릭 멀로우니(Patrick Maloney, 마크의 아버지)와 그의 두 형제는 방향을 바꿔 옥수수, 밀, 대두를 중점적으로 재배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켄터키주 오하이오강 건너의 6,000평방미터의 토지를 매입하여 농장의 규모를 두 배 이상 늘렸다. 

이것이 마크 멀로우니가 자란 환경이었지만 그가 농업에 종사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곧 분명해졌다. 유망한 농업인들의 경진대회인 4-H에서 그가 최고상을 받은 분야는 바로 대중연설이었다. 1966년 그는 “꿈은 목표가 된다”라는 연설로 일리노이주 박람회에서 블루리본을 받았다. 2년 후에는 “bludgeon(패다)”의 정확한 철자를 써서 카운티의 철자 맞추기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다시 2년 후 그는 갤러틴 카운티 4-H 연맹의 회장이 되었다. 그 다음으로 앞선 성과를 모두 넘어서는 대단한 일이 생겼다. 1962년 멀로우니와 5살이었던 여동생 크리스티(Kristi)가 리지웨이에서 매년 열리는 ‘팝콘데이’에서 하와이를 주제로 한 의상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세계 팝콘의 수도’임을 자부하는 리지웨이에서 매년 9월 두 번째 토요일 열리는 팝콘데이만큼 성대한 행사는 없다. “팝콘데이는 연중 마을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라고 예전 리지웨이에서 거주했고 현재 일리노이주 댄빌 로타리클럽 회원인 릭 로트라멜(Rotramel)이 말한다. 스트랜드 극장에서의 무료 영화와 퍼레이드가 끝나면 아이들은 무대에서 열리는 팝콘 먹기, 풍선껌 불기, 개구리 점프 시합에 참가했다. 우승자들은 은화를 받았다. 

오후 1시 “매머드 수레와 밴드 퍼레이드”가 메인스트리트에서 시작되었다. 이 행사에서는 지역 신문의 말을 빌리면 “팝콘 여왕과 시녀들, 밴드, 수레, 의장대, 경찰 오토바이, 말, 근대식 농업장비 그리고 수많은 대단한 참가자들”이 등장했다. ITPA (‘일리노이 트랙터 끌기 협회’를 말한다) 규칙이 적용되는 트랙터의 퍼레이드 수레 끌기 이후의 일정은 그랜드 올 오프리(Grand Ole Opry)에서 영가, 가스펠, “틴 어 고고(Teen-A-Go-Go)”로 불리는 행사까지 모두 음악과 엔터테인먼트 공연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종류의 행사에는 사회자가 필요하다. 그래서 1981년 리지웨이는 마크 대니얼 멀로우니에게 사회자의 책임을 맡겼다. 그는 그 후로 매년 사회를 맡았는데, 딸 필리스(Phyllis)의 세례와 장례식에 참석해야 했던 두 번의 예외가 있었을 뿐이다. 팝콘데이는 이제 하루가 아닌 이틀이 되었고 멀로우니는 “나는 팝콘데이 주말 일정을 반드시 비워둔다”고 말한다. 심지어 그의 자동차 번호판은 팝콘을 의미하는 PPCRN이다.

왼쪽 상단부터 시계방향: 1960년대 중반 가족의 농장에 있는 마크, 어머니 도린, 아버지 패트릭, 두 여동생 크리스티(왼쪽)와 에린; 마크가 로타리에 입회한 1980년의 마크와 게이; 1972년 리지웨이 고등학교 졸업생 대표 시절; 여전히 웃고 있는 2019년의 마크와 게이; 1990년 달라스 국제협의회에서 멀로우니 부부와 두 딸, 마가렛(왼쪽)과 필리스; 멀로우니 가문은 180년 동안 농장을 운영해 왔다.

“마크는 과장된 연기도 하고 농담도 던진다”라고 1990년 중반부터 퍼레이드 사회를 도와온 로트라멜이 말한다. “그는 유머 감각이 뛰어나다. 그는 일도 제대로 해낼 것이지만 동시에 즐기며 일할 것이다.” 

로트라멜은 “마크와 나는 우리 고향에 대해 같은 감정을 갖고 있다. 우리는 매우 자랑스럽다. 매년 사람들이 우리에게 사회를 요청한다. 그러면 나는 ‘전화할 필요도 없어요. 우리가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멈추지 않을 겁니다’라고 말한다”라고 덧붙인다. 

멀로우니는 8학년을 마칠 무렵인 1968년 세인트루이스의 가톨릭 고등학교인 샤미네이드에 지원했다. 학교에서는 전액 장학금을 제안했으나 부모는 그를 그곳에 보내지 않았다. 샤미네이드는 보딩스쿨이었는데 아들을 떠나 보낼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부모는 마치 멀로우니에게 더 큰 동기부여가 필요하다는 듯 그가 갈 수 있는 최고의 대학에는 그를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멀로우니는 샤미네이드 대신 그의 어머니 도린(Doreen)이 영어 교사로 있던 리지웨이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정말 재미있고 대단한 교사였다”고 멀로우니보다 한 학년 위였던 로트라멜이 회상한다. “모두가 그녀를 좋아했다.” 

항상 그렇듯 멀로우니는 학업을 포함하여 모든 면에서 뛰어났다. 그는 학생회 회장, 학생과 교사로 이루어진 학교 정책 위원회 회원 등 여러 직책도 맡았다. 4-H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계속 하면서도 밴드, 합창, 신문, 학년앨범, 스페인어 클럽에서도 활동했다. 윤리와 도덕적 행동을 강조하는 우수 학생 모임인 전국 베타 클럽에서는 주 대표 임원이 되었다. 졸업식에서는 졸업생 대표로 연설을 했다. 그리고 동급생들의 투표에서 멀로우니는 “가장 성공할 것 같은 친구”로 뽑혔다. 1972년 리지웨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28개의 카운티로 이루어진 소속 교구에서 ‘올해의 가톨릭 청년’으로 표창을 받았다.  

그 해 가을 멀로우니는 대학에 진학했다. 부모님이 약속한대로 그는 자신이 갈 수 있는 가장 좋은 대학인 하버드에 입학했다. 우등으로 역사 전공 학위를 받은 그는 1학년 봄학기에  주정부 행정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학점 미부여 과정을 수강했다. 그 수업의 강사는 일리노이주의 정치인으로 하버드 대학 존 F. 케네디 행정대학원의 정치연구소에서 펠로우로 1년을 보내게 된 폴 사이먼(Paul Simon)이었다. 둘은 친구가 되었다. 

1974년 사이먼은 하원 선거에서 승리했다. (<갤러틴 데모크래트(Gallatin Democrat)>지는 선거 전 유세에 참여한 멀로우니가 검은 가죽 재킷을 입고 후보 사이먼과 나란히 서서 카나리아를 삼킨 고양이처럼 미소 짓고 있는 사진을 실었다.) 졸업 후 여름 멀로우니는 하원의 LBJ 인턴십 프로그램에 참가하여 워싱턴 D.C.에 있는 사이먼의 사무실에서 2개월 간 근무했다. 인턴 명단을 발표하면서 <데모크라트(Democrat)>는 하버드에서 멀로우니가 “하버드 메모리얼 소사이어티 회장, 풋볼, 축구, 라크로스 팀의 매니저, 학생 관리자 협의회 회장, [그리고] 하버드 교수 체육위원회의 회원”이었다고 언급했다.

 

리지웨이의 연례행사인 '팝콘 데이'의 장수 사회자 멀로우니와 릭 로트라멜은 2017년 팝콘 데이 퍼레이드에서 그랜드마샬로 등장하기도 했다.

Photograph by Eddie Quinones

1977년 가을 밴더빌트 로스쿨 2학년이었던 게이 블랙번(Gay Blackburn)은 국제법에 관한 한 세미나에 등록했다. 아그네스 스콧 대학교를 졸업한 블랙번은 앨라배마주 디케이터 출신으로 그녀의 아버지는 시장직을 역임한 저명한 변호사였다. 세미나 2주차 였던 어느 날 수업 중 여러 명의 학생이 작은 팝콘 봉지를 꺼냈다. 주말을 맞아 내슈빌로부터 일리노이 남부로 여행을 와서 팝콘데이라는 행사에 참석하고 온 학생들이었다. 그 여행 그룹의 리더는 그녀와 함께 국제법 수업을 듣던 마크 멀로우니였다. 

멀로우니와 블랙번은 고향 마을의 매력에 대한 대화를 하게 되었고 가을 내내 둘은 꾸준히 데이트를 했다. 크리스마스 연휴가 되자 앨라배마에 있던 블랙번은 내슈빌 하버드 클럽을 방문했고 멀로우니는 1977년 연말을 디케이터에서 보냈다. 그들은 디즈니 영화를 보며 한 해를 함께 마무리했다. “우리가 서로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게이가 회상한다. “우리 둘은 새해 전야에 <피터와 드래곤>을 보며 행복해 했다.” 

게이가 멀로우니의 집을 처음으로 찾은 것은 2월 초였고 멀로우니는 이를 “숙명적이었던 게이의 첫 방문”이라고 불렀다. 갤러틴 카운티 인구는 8,000명이 되지 않았고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멀로우니 가의 친척이었다”고 게이가 회상한다. “마크와 그의 어머니는 나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애썼기 때문에 나는 22명의 친척만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리지웨이의 농장에서 켄터키의 농장까지 드라이브를 하다가 인디애나 주 뉴하모니에 있는 레드 제라니움에서 멋진 저녁식사를 하며 500이라고 하는 카드게임을 했다. 그들은 가게에 잠시 들러 필름을 샀고 게이는 마크 부모님의 모습을 촬영했다.

 

멀로우니는 “나는 팝콘데이 주말 일정을 반드시 비워둔다”고 말한다. 심지어 그의 자동차 번호판은 팝콘을 의미하는 PPCRN이다.

일요일 오전 마크와 게이는 근처 쇼니타운에서 미사에 참석한 후 내슈빌로 돌아갔다. 마크가 게이에게 가장 먼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1850년대 멀로우니 가문이 건립에 도움을 준 폰드세틀먼트의 세인트패트릭 성당이었다. 그날은 눈이 너무 많이 쌓여있어서 마크는 다음에 그녀가 오면 묘지까지 걸어가보자고 했다. 마을을 나오며 그들은 멀로우니 농장에 멈췄고 게이는 그의 집을 촬영했다. 마크의 부모는 입구로 나와 손을 흔들었다. 

열흘 후 마크와 게이는 밴더빌트 대학의 도서관에서 다시 만났다. 그날 저녁 그는 그녀에게 그의 부모님에게 리지웨이스퍼 도로를 달리다 다른 차와 정면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했다고 알렸다. 패트릭은 48세, 도린이 46세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게이가 찍은 사진들은 그들의 마지막 모습이 되었다. 사고가 일어난 날은 뉴욕에서 학교를 다니던 마크의 여동생 크리스티의 21번째 생일이었다. 차 뒷자리에 타고 있던 여동생 에린(Erin)은 목숨을 구했지만 중상을 입었다. 

몇 주 후 마크는 리지웨이 고등학교에 팻&도린 멀로우니 추모 장학기금을 설립했다. 그 즈음 <갤러틴 데모크래트>에 공지가 게재되었다. 마크는 최근의 사건 후 그의 가족의 곁을 지킨 모든 이들에게 “깊고 진심 어린 감사”를 표했다. 그는 “이러한 고난의 시기를 통해 갤러틴카운티의 주민들은 우리에게 넘치는 사랑, 연민, 지지를 보내주었다. 인간의 선함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다시 한번 확인되었다.”고 썼다.

사고 이후로 게이는 폴 사이먼을 포함하여 애도를 위해 마크의 집을 찾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마크의 여자친구”로 소개했다. 그녀는 곧 여자친구 이상의 존재가 되었고 4월 초가 되자 둘은 약혼을 했다. “결국 같은 곳에 이르렀겠지만 그 사고 후로 우리 관계가 조금 더 빠르게 진전되었다”고 게이가 당시의 일을 말한다.

 

상단부터 시계방향: 1990년 나이지리아의 라고스 고등학교를 방문한 커플; 작년 가을 미국령 버진아일랜드에서의 정수기 보급 프로젝트에 참가한 마크와 게이. 디케이터 로타리클럽과 디케이터 데이브레이크 로타리클럽은 이 이니셔티브를 위해 세인트 토마스 이스트 로타리클럽과 손을 잡았다; 멀로우니 부부와 조나단 마지약베 전 RI 회장; 1991년 디케이터에서 멀로우니 가족과 함께 한 라젠드라 사부 당시 RI 회장 부부; 2012년 인도 방갈로어에서의 마크와 게이; 1985년 멀로우니 부부와 디테이터 로타리클럽을 방문한 나이지리아 연구단교환 팀

로스쿨 마지막 해인 3년차에 두 사람은 향후의 일을 생각했다. “나는 오번이나 앨라배마에 있는 대학을 가지 않았다”라고 게이가 말한다. “나는 나의 지평선을 넘어 어딘가로 가고 싶었다. 그래서 애틀랜타의 아그네스 스콧 대학을 택했다.” 그러한 감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세상 어딘가”를 보고 싶었다. 

하지만 디케이터에 간 어느 주말 게이의 아버지 J. 길머 블랙번(J. Gilmer Blackburn)은 마크를 데리고 드라이브를 나갔다. “길머는 소도시에 살며 가정법 변호사로 일하는 삶의 장점에 대해 설명했다”고 멀로우니가 말한다. 게이와 마크에게 디케이터에 살면서 블랙번의 법률회사에서 일한다는 새로운 가능성이 열렸다. 그들은 그러한 가능성을 논의했고 그는 “우리는 서로 의견이 다르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그는 덧붙여 “디케이터에서 살기로 하면서 우리는 게이 부모님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고 말한다. 다른 대화 자리에서 게이도 거의 같은 표현을 사용하며 마크와 비슷한 생각을 했음을 밝혔다. 그들은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았지만 사실상 그 결정이 그들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아버지는 우리가 디케이터에서 잘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선견지명을 갖고 있었다”고 게이가 말한다. “당시 우리는 그런 점을 충분히 알지 못한 것 같다.” 

“길머는 대단한 사람이었다”라고 켄 슈퍼트(Ken Schuppert)가 아내 린(Lynn)과 있는 자리에서 말한다. 슈퍼트는 길머가 개업하고 이제 ‘블랙번, 멀로우니 & 슈퍼트’로 알려진 법률회사의 파트너/동료 변호사이다. (멀로우니 부부와 마찬가지로 슈퍼트 부부도 로타리안이며 켄 슈퍼트는 현재 로타리재단 이사회의 부이사장이다.) “생명보험 조세에 대해 길머는 누구보다도 뛰어난, 보기 드문 전문가였다. 그는 1950년 중반 알라배마주 버밍엄 북부의 첫 조세 전문 변호사였다. 동시에 그는 지역사회에 봉사하고 자신이 받은 혜택을 주민들에게 돌려주었다. 우리 모두는 이러한 점을 길머로부터 배웠다.” 

“나는 길머가 마크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 아버지와 같았다고 생각한다”고 디케이터  로타리클럽의 빌 와이커가 말한다. “그들은 매우 돈독하며 심오한 관계에 있었다.” 

와이커는 게이의 어머니에 대해서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필리스는 개성이 강했다”고 그가 말한다. “그녀는 길머를 뒷받침하면서도 자신만의 생각, 사상, 활동, 지향점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거침이 없었다. 필리스가 무언가 하고자 한다면 단단히 마음을 먹어야 했다.

 

“오늘날까지 나는 그를 ‘대사님’이라고 부른다. 그는 사람들과 매우 잘 지냈으며 그들의 문화를 포착하고 이해하는 데도 뛰어났다.” 

마크와 게이는 1979년 결혼을 하고 마크가 뉴욕대학교에서 조세 석사를 취득한 후 디케이터에 정착했다. 농업에 친숙했던 마크는 새로운 이웃들과 빠르게 가까워졌다. “마크는 훌륭한 인물의 자질을 완벽하게 조합해 놓은 사람”이라고 와이커는 말한다. “그럼에도 그는 악수를 하자마자 좋아할 만한 사람이기도 하다.” 

“마크는 내가 아는 가장 품위 있고 정중한 사람 중 한 명이다”라고 디케이터 클럽 회원인 엘런 디디어(Ellen Didier)가 말한다. “그런 그가 얼마나 따뜻하고 재미있는 사람인지 알게 되면 놀라게 된다. 그의 마음, 겸허함, 위트, 그리고 자조적 태도에서 진정성을 느낄 수 있다.” 

멀로우니는 1980년 로타리에 입회했다. 그로부터 5년 후 30세였던 그는 디케이터 로타리클럽의 회장이 되었다. 회장이 되었을 때 그는 로타리가 후원한 나이지리아의 연구단교환 팀이 앨라배마에 올 예정이지만 디케이터는 일정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전화를 하여 아프리카에서 온 방문단이 디케이터에서 이틀을 머물도록 했다. “우리는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고 게이가 당시를 떠올린다. “마크와 나는 우리 집에서 그들을 위해 파티를 열었고 그들이 우리의 환대에 만족하길 바랐다. 당시의 팀 리더는 ‘이 젊은이가 내년에 나이지리아 방문팀을 이끌고 오길 바란다’라고 말했고, 실제로 마크는 딸 필리스와 마거릿이 각각 4살과 2살이었을 때 나이지리아로 가서 40일을 보내고 왔다.” 그의 회장표어 “세계를 연결하는 로타리”를 위해 씨앗을 뿌리는 활동이었다. 

“그곳 사람들을 우리를 친선 대사로 불렀으며 오늘날까지 나는 그를 ‘대사님’이라고 부른다”고 디케이터에서 나이지리아를 방문한 연구단교환 단원 6명 중 한 명이었던 마이크 컬(Mike Curl)이 말한다. “그는 사람들과 매우 잘 지냈으며 그들의 문화를 포착하고 이해하는 데도 뛰어났다.” 

1990년 7월 마이크는 나이지리아에 다시 갔고 이번에는 게이도 그와 함께 아프리카미술에 대한 대학 교재를 들고 갔다. 마크는 로타리의 첫 아프리카 지역 흑인 이사가 되어 임기를 갓 마친 조나단 마지약베를 예전에 만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방문 시 마크와 게이는 카노의 마지약베의 집에서 마지약베와 그의 아내 아데(Ade)와 함께 머물렀다. “마크는 매우 유쾌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마지약베가 말한다. “그는 매우 근면하다. 나는 그를 걸어 다니는 컴퓨터라고 부른다. 그는 아주 사소한 것까지 모든 것을 상세하게 기억한다.” 두 부부는 돈독한 우정을 키워나갔고 마지약베가 2003-04 RI 회장 후보로 지명되었을 때 그와 아데는 마크와 게이를 에이드로 선택했다.

 

 

2019-20년 국제로타리 회장 가족 일동(왼쪽부터): 딸 필리스와 수잔나, 손자 피터, 사위 블레이크, 딸 마가렛, 게이, 손자 패트릭, 마크

Photograph by Bryan Meltz

2003년 회장으로 임기를 시작하기 한 달이 채 남지 않았을 때 마지약베는 호주 브리스번에 있다가 아데가 잉글랜드 리즈에서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나는 마크 멀로우니가 없었더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고 마지약베가 회상한다. “그는 나를 위해 리즈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알아봐주었고 게이와 함께 자비를 들여 리즈로 와서 내 곁을 지켜주었다. 우리의 마음을 함께 했고 그들은 디케이터에 있는 내 가족이라 할 수 있다.” 

로타리를 통해 생긴 또 다른 오랜 친구는 멀로우니의 에이드 래리 선스포드(Larry Lunsford)다. 미주리주 캔자스시티-플라자 로타리클럽의 회원이며 6040지구 전총재, 전 RI 이사인 런스포드는 로타리에서 화려한 경력을 쌓았다. 하지만 그는 가장 먼저 “로타리에서 마크 멀로우니처럼 경험이 풍부한 사람을 찾기가 어렵다. 그는 자신과 로타리의 목표를 가장 효과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프로세스를 구상하고 이행하는 데 탁월하다. 그는 조직 및 행정 능력을 통해 로타리를 더욱 좋은 곳으로 만들 수 있는 기회를 극대화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런스포드는 멀로우니의 로타리 멤버십 강화에 대한 “전략적 초점”과 함께 특히 회원을 영입하고 유치하기 위해 “우리 접근법에 다양성을 확대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 “세계에서 로타리의 위상을 높이는 또 다른 방법으로서 유엔과의 파트너십 강화를 우선 순위로 설정했다.” 그는 또한 “마크는 로타리와 로타랙터 간의 시너지 강화를 바란다. 로타랙터들은 로타리와의 관계 향상 가능성을 더욱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는 그러한 열정에 불을 지피고자 한다.” 

런스포드는 주제를 바꿔 “마크의 가장 큰 강점은 배려심이다. 그는 따뜻한 마음을 갖고 있다. 게다가 그의 곁에는 게이가 있다. 둘은 최상의 팀으로서 마크는 그 덕을 보고 있기도 하다”라고 말한다.

스스로 예상했던 것보다 세상을 더 많이 보아온 열정적인 여행자인 게이는 집 문을 열자마자 자신이 다녔던 고등학교가 바로 보이는 것이 아이러니라고 느낀다. “디케이터로 돌아오면서 우리가 세상을 볼 기회로부터 등을 돌리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고 그녀가 말한다. 

그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멀로우니 부부의 거실 벽면에는 게이가 그린 다채로운 색상의 그림들과 함께 39년의 로타리 여정이 얼마나 세계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사진 액자들이 걸려있고 선반에는 각지의 기념품들이 자리잡고 있다. 게이는 1996년 당시 신생 클럽이었던 디케이터 데이브레이크 로타리클럽에 입회하면서 공식적으로 로타리 가족이 되었다. “마크와 나는 함께 변호사 활동을 하고 우리 가족을 함께 돌볼 수 있다”고 그녀가 밝힌다. “하지만 세계 어디든 우리에게 지나치게 큰 로타리클럽은 없다.” 

딸들 또한 부모만큼이나 로타리 여정의 중요한 일부가 되었다. “우리가 로타리 가족으로 진화해가면서 딸들은 세계에 대한 더 넓은 시야를 갖고 자랄 수 있었다”고 게이가 말한다. 필리스와 마가렛은 부모와 함께 30개 이상의 국제대회에 참가했고 어린 시절부터 전 세계의 사람들을 만나 소통한 경험은 그들 인생의 방향에 큰 영향을 주었다. 어렸을 때부터 지리에 관심이 있었던 필리스는 하버드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영국 역사와 문학을 전공하고 예일에서 법학 학위를 받았다. 언어와 단어에 매혹된 마가렛은 하버드에서 언어학을 공부했다. 그 후 그녀는 뉴욕에서 출판업계에서 종사했었으며 이제 롱아일랜드의 스토니브룩 대학교 의대에서 4학년을 곧 마칠 예정이다.

 

“마크의 가장 큰 강점은 배려심이다. 그는 따뜻한 마음을 갖고 있다. 게다가 그의 곁에는 게이가 있다. 둘은 최상의 팀으로서 마크는 그 덕을 보고 있기도 하다.”

2014년 멀로우니는 교통사고로 어머니를 잃은 수잔나 그리어(Suzanna Greer)를 셋째 딸로 받아들였다. “마크는 자신이 젊었을 때 겪은 비극 때문에 특히 수잔나의 상황에 공감했다”고 게이가 말한다. “내가 수잔나와 같이 살고 싶다는 생각을 그에게 얘기하자 그는 즉시 좋다고 말했다.” 현재 25살인 수잔나는 사우스앨라배마 대학교를 다니고 있으며 로타리 국제대회를 세 차례 다녀왔다. 필리스와 남편 블레이크 존슨(Blake Johnson)의 아이들인 7세의 패트릭(Patrick)과 4세의 피터(Peter)도 이미 국제대회에 두 번 참석했다. 

멀로우니 부부의 거실에 걸려 있는 사진들 중에는 마크가 두 명의 교황과 함께 찍은 사진들도 있다. 일설에 의하면 그의 이름 멀로우니는 게일어로 “교회의 헌신적인 신자”라는 의미인 ‘매욜 도니(Maol dhomhnaigh)’에서 유래했다고 하니 놀랄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는 디케이터의 성모영보(Annunciation of the Lord) 성당(예전의 세인트앤 성당)에서 재무위원회 위원으로 12년 간, 세인트앤 가톨릭학교 위원회에서 16년간 봉사해왔으며 그 외에도 다양한 방법으로 성당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우리는 항상 마크에게 의지할 수 있다”고 성모영보 성당에서 오랜 기간 강론을 했던 레이 렘케(Ray Remke) 신부가 말한다. “우리가 무언가가 필요할 때마다 그는 가능한 방법을 모두 동원하여 도움을 주었다. 그는 언행일치의 삶을 통해 믿음을 실천하고 있다.” 

멀로우니는 세계교회주의 정신을 개인 신앙에 적용하고 있다. 그와 게이는 일요일마다 규칙적으로 성모영보 성당의 미사와 함께 그들이 결혼식을 올렸고 마크가 안내인으로 봉사하는 연합감리교회의 예배에 참석한다. 그는 세인트존 성공회 성당의 성경공부에도 참석한다. “나의 아버지는 예배가 교회, 가족, 지역사회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쳐주셨다”고 디케이터 클럽 회원인 로니 듀크스(Ronnie Dukes)가 말한다. “분명 마크는 그러한 면에서 모범을 보이고 있다.” 

그의 제 2의 고향이 된 디케이터에서 멀로우니는 1인 상공회의소 역할도 하고 있다. 그는 남북전쟁 당시의 총알과 구포탄이 박혀있는 올드스테이트뱅크 건물, 로타리안들과 주민들의 지원으로 최근 새롭게 단장한 도시 내의 녹색 오아시스 델라노 공원에 있는 리버와일드 놀이터와 물놀이장 등 디케이터의 명소를 방문객들에게 자랑스럽게 소개한다. 매년 봄방학마다 하버드 학생들이 와서 하고 있는 해비타트 활동은 2002년 필리스가 하버드에 다닐 때 시작하여 오늘날 디케이터 데이브레이크 클럽의 후원으로 이어진 전통이 되었다. 

디케이터의 주민들도 마찬가지로 마크를 고향의 영웅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모건 카운티 지방법원 판사였으며 현재 디케이터에 거주하면서 역사학자로 역사자원 및 행사를 총괄하고 있는 데이비드 브리랜드(David Breland)는 “국제로타리 회장이 앨라배마의 디케이터 출신이라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우리 모두는 지금 대단히 들떠있다.” 

“마크는 독특한 사람이며 내가 가장 깊은 인상을 받은 사람 중 한 명이다”라고 와이커가 말한다. “그가 로타리 차기회장이라는 사실이 가슴 벅찰 정도로 기쁘다. 그는 굵직한 족적을 남길 것이다.

 

이 스토리는 영문잡지인 <The Rotarian>에 소개되었던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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