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로타리의 역사
한국 최초의 로타리클럽은 1927년 11월 10일 서울(당시 경성)에서 창립되었다. 그 이후로 한국의 로타리 회원들은 어려운 시기에도 친목, 봉사, 그리고 리더십에 대한 헌신을 꾸준히 이어왔다. 그들은 회원을 늘리고, 조직을 이끌며, 전 세계 로타리인들에게 환대를 베풀고, 실천에 나서는 사람들임을 보여주었다.
초창기
로타리 회원들은 이미 1922년경부터 한국에 클럽을 설립하는 데 관심을 보였지만, 당시 로타리는 기존에 클럽이 존재하던 국가 내에서의 확대에 우선순위를 두었기 때문에 실제 추진은 미뤄졌다.
이 아이디어는 1926년에 다시 조명되었다. 미국의 두 클럽이 한국에 거주하는 미국인들 가운데 클럽을 조직할 수 있는 인물들이 있다고 로타리 지도자들에게 연락한 것이다. 캔자스주의 한 클럽은 장로교 선교사로 활동 중인 명예회원을 추천했고, 아이오와주의 클럽은 YMCA에서 일하는 인물을 추천했다.
로타리 회원들과 학생들이 안동에 있는 안동영명특수교육학교 온실에서 수확한 신선한 상추를 지역 식당에 전달하고 있다. 2014년.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최초의 로타리클럽들을 조직한 제임스 데이비슨과 새로운 국가에서의 클럽 창립을 위해 노력하던 다른 지도자들은 이러한 급작스런 방향 전환에 주저했다. 그들은 로타리 경험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이러한 책임을 맡기는 것에 대해서도 우려를 가지고 있었다.
본격적인 활동은 1927년에 시작되었다. 일본 도쿄 로타리클럽의 회원들이 경성에 클럽을 설립하자고 제안한 것이 계기였다. 오사카 로타리클럽의 히라오 하치사부로가 일본 지역 로타리 특별위원으로서 한국 최초의 클럽 창립을 감독했다. 당시 한국은 일제 강점기에 있었으며, 새로 설립된 클럽에는 일본인과 한국인 회원이 함께 포함되었다.
경성 로타리클럽(후에 서울 로타리클럽으로 재창립)은 국내외의 다양한 방문객들을 맞이했다. 1931년에는 인천항에 크루즈선이 입항해 미국 로타리 회원들이 회의에 참석한 일을 매우 기쁘게 보고했다. 또한 매년 가족 야유회를 열었는데, 1934년 조선맥주 주조장 부지에서 열린 행사에서 참가자들은 밤줍기를 하며 여러 나라의 음식을 함께 즐기기도 했다.
경성 로타리클럽은 1935년 5월 부산, 1937년 7월 평양, 1938년 6월 대구에 로타리클럽이 설립되기 전까지 한국에서 유일한 로타리 클럽이었다. 그러나 당시 한국에서의 로타리 성장은 오래가지 못했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1940년 한국의 모든 로타리클럽들은 해산되었고 같은 해 12월, 이들 클럽의 국제로타리(RI) 회원 자격도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다시 돌아온 로타리
경성 로타리클럽은 1949년 3월 15일, 25명의 회원으로 서울 로타리클럽으로 공식 재창립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로 서울이 북한군에 점령되자, 클럽 회원들은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피난길에 올랐다. 일부 회원들은 피난처인 부산에서 다른 피난민들을 돕고, 이전 로타리클럽 모임과 유사한 모임을 이어갔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1952년 1월 3일 부산 로타리클럽이 공식적으로 재창립되었다.
1961년 1월, 국제로타리는 한국 내 10개 클럽을 하나의 로타리 지구로 편성했다. 당시 지구 내 클럽 수가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로타리 지도자들은 한국의 클럽들을 다른 아시아 국가의 클럽들과 함께 편성하는 것보다 독자적으로 편성하는 것이 한국 로타리의 성장에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판단했다.
실제로 로타리가 창립 100주년을 맞이한 2005년, 한국에는 1,200개 이상의 로타리클럽과 4만 8,900명의 회원이 있었고, 20년 후에는 1,600개 이상의 클럽과 6만 4,000명의 회원을 보유하게 되었다.
국제로타리 회장
한국은 커다란 영예로 여기지는 국제로타리 회장을 두명이나 배출하였다.
서울 한강 로타리클럽의 이동건(D.K. Lee) 2008-09년도 회장은 취임을 앞두고 한국 로타리의 성장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1950년부터 1953년까지 이어진 한국전쟁과 그 이후에 한국은 매우 가난했습니다. 많은 국제기구와 여러 나라 정부의 도움으로 우리는 경제를 다시 일으킬 수 있었지요. 이제 우리 경제는 크게 성장했고, 모든 한국인은 받은 것을 다시 돌려주고 싶어 합니다.”
서울 새한양 로타리클럽의 윤상구 전 재단이사는 2026–27년도 국제로타리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탁월한 리더십과 기업가 정신을 겸비한 로타리 지도자였지만 취임을 앞두고 2025년 9월에 별세했다.
전 세계 로타리를 호스트하다
한국 최초의 클럽에서 시작된 전통을 이어받아, 한국 로타리 회원들은 전 세계에서 온 방문객들을 계속해서 환영하고 있다. 이들은 손님들을 맞이하고, 로타리 청소년교환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대규모 행사를 개최한다.
1979년 서울에서 열린 로타리 아시아 지역대회에는 예년보다 거의 세 배나 많은 참가자가 모여 개회식을 두 차례에 걸쳐 진행해야 했을 정도였다. 1979-80년도 국제로타리 회장이었던 제임스 L. 보마 주니어는 이 대회를 "아시아와 한국에서 로타리의 성장을 보여주는 중요한 행사"라고 평가했다.
1989년 국제로타리 세계대회는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열렸던 올림픽공원에서 개최되어 강영훈 당시 국무총리가 환영사를 했다. 당시 이 대회에는 3만 8,000명이 참가, 로타리 역사상 두 번째 대규모 세계대회를 기록했다. 또한 2016년 서울 세계대회에는 4만 4,600명이 참가하여 새로운 두 번째 기록을 수립했다.
실천에 나서는 사람들
한국 로타리 회원들은 수십 년 동안 실천에 나서는 사람들임을 보여주고 있다. 한때 다른 나라 클럽들이 주도한 봉사 프로젝트의 혜택을 받던 나라였지만, 오늘날의 한국 로타리 회원들은 자국과 전 세계에서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어 나가는 주체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1963년, 한국의 로타리 회원 약 600명은 서울 서쪽 산악 지역에서 대규모 조림 사업을 벌였다. 이 지역은 제 2차 세계대전 말기에 전기와 석탄 부족으로 나무를 땔감으로 사용하면서 심각하게 황폐해졌고, 한국 전쟁 중에도 많은 나무가 훼손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남아 있는 나무들을 보호하고 더 많은 나무를 심어 "묘목들이 하늘만큼 높이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진행되었다.
한국 로타리 및 로타랙트클럽 회원들이 어려운 이웃에게 나눠줄 곡물을 포장하고 있다. 2019년.
2008년에는 환경 문제가 다시 한번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한국과 몽골의 로타리 회원들은 로타리재단의 보조금을 받아 고비 사막의 사막화와 토양 침식 방지 활동을 펼쳤다. 다년간 진행된 이 사업에 참여한 회원들은 나무를 심고, 기반 시설을 구축했으며, 목축업자들과 협력하여 가축 과방목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했다.
1989년, 서울 로타리클럽 회원들은 부산에 거주하는 베트남 난민들을 위해 겨울옷과 신발, 의약품을 구입했다. 한 회원은 자신이 운영하는 섬유 회사에서 새 옷을 기증하기도 했다. 이 프로젝트 덕분에 약 300명의 난민들이 익숙지 않은 추위 속에서 겨울을 무사히 보낼 수 있었다.
한국의 로타리클럽들은 오랫동안 탈북 주민들을 위해 학교를 짓고, 장학금을 제공하며, 건강 검진을 지원해 왔다. 2016년 이주민들이 설립한 울산 자유 로타리클럽은 개인적인 경험과 로타리 네트워크를 활용해 주변에 가족이나 친지가 없는 북한 이탈 주민들이 낯선 경제 시스템과 문화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회원들은 한국 밖의 사람들을 돕는 데에도 힘쓰고 있다. 영주 모란 로타리클럽과 3630지구는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 인근에서 한국인, 아시아계 미국인, 태평양 제도 주민 중 발달 및 지적 장애인을 위한 직업 훈련 프로그램을 미국 로타리 회원들과 협력하여 운영하고 있다.
한편 로타리의 공식 지역잡지 중 하나인 <로타리 코리아>는 1963년부터 한국 로타리 회원들의 활동을 소개해 왔다.
— 2025년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