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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전쟁 현장을 가다: 최전선에서 만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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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1년이 되어가는 지금, 로타리 매거진의 웬 황 편집장이 최전선에서 인도주의적 위기에 대응하고 있는 로타리 회원들을 직접 만났다. 2부로 구성된 기사 중 우크라이나에 앞서 방문했던 폴란드 현지 상황을 먼저 소개한다.

화요일, 저녁 7시 45분, 바르샤바

나는 저널리스트로 일하며 전 세계의 국제 위기, 유혈 혁명 , 자연 재해 현장을 취재해왔다. 로타리 영문 잡지의 편집장으로 일하면서는 국외로 피신하는 난민들과 우크라이나인들을 돕기 위한 회원들의 노력에 관해 거의 매일 보고를 받았다. 우리 팀은 초기에 우크라이나 로타리 회원들과 매주 화상 회의를 가졌으며, 침공 첫 3개월 동안 로타리재단이 전쟁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인도주의적 지원을 제공하기 위해 1,500만 달러를 모금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당장이라도 우크라이나로 달려가 인도주의적 노력이 결집되고 있는 현장을 직접 보고 싶어졌다.

그러다 우크라이나에서 로타리의 지역 잡지인 <Rotariets>를 발행하는 미콜라 스테블얀코가 나를 우크라이나 서부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폴란드 국경과 가까운 리비우로 초대했다. 그곳에서 열리는 로타리재단 세미나에 다른 회원들과 함께 참석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바르샤바시티 로타랙트클럽의 창립 회장인 폴리나 코노프카

Wen Huang

바로 이것이 내가 10월의 어느 밤, 폴란드 수도인 바르샤바 기차역에서 바르샤바시티 로타랙트클럽의 창립 회장인 폴리나 코노프카를 기다리고 있는 이유였다. 30세의 폴리나는 나를 근처 식당으로 데려가 페퍼로니 피자를 먹으며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가족과 함께 몰디브로 가는 비행기에 있었다고 말했다. 비행기가 도착하자마자 그녀는 바르샤바에 있는 동료 로타랙터들과 연락해 도움을 줄 방법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첫 한 달 동안은 정부에서 기업까지 나라 전체가 폴란드에 들어온 난민과 우크라이나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멈춘 것 같았죠. 로타리 회원이라면 누구나 본능적으로 도움을 주고 싶어했을 거예요."

바르샤바 로타랙터들은 소셜미디어를 사용해 다른 나라에 있는 친구들에게 기부를 호소했다. 폴리나의 클럽은 빌라누프 인터내셔널 로타랙트클럽과 함께 교외에 약 40명의 우크라이나 여성과 어린이를 위한 장기 거처를 마련하고, 쿠킹클래스와 디스코 파티 등 난민들을 위한 다양한 행사를 열었다. 토요일이면 상품권을 가지고 이들을 방문해 쇼핑센터로 데려다주기도 했다. "우리는 이들과 매주 만나 폴란드어와 영어를 가르치고 새로운 나라의 삶에 적응하도록 도왔습니다다."

전쟁이 시작된 지 한 달 후, 폴란드는 약 200만 명의 우크라이나 난민을 맞이했다. 약 30만 명이 바르샤바에 머물렀지만 로타리 쉘터에 머물렀던 40명 중 절반 정도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조국으로 돌아갔다. 폴리나는 "많은 사람들이 가족과 부모 형제, 조국을 그리워했어요"라고 설명한다. 폴란드 정부가 제공했던 식품 및 교통 보조금 지원이 종료된 것도 한 몫을 했을 테고 전쟁의 여파로 에너지 및 식료품 가격이 급등한 것도 한 요인이 될 것이다. 폴리나는 자신과 동료 로타랙터들은 앞으로도 남아 있는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고 폴란드어를 배우도록 도울 것이라고 밝혔다.

러시아가 가을 내내 우크라이나 도시에 대한 폭격을 강화함에 따라 폴리나는 사람들이 다시 폴란드로 피난해야 할 수도 있으며 바르샤바 로타랙터들은 "그들을 환영하고 도울 준비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호텔로 돌아와 바에서 사진작가이자 다큐멘터리 작가인 미국 오하이오주 출신의 로타리안 에드 저클을 발견했다. 그는 "TV에서 우크라이나 사태를 보았을 때, 직접 현장에 가서 그것을 기록해야 할 의무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리비우 로타리클럽이 재단 세미나를 주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우크라이나에서 로타리 회원들을 만나고 전국 곳곳을 방문할 수 있기를 바라며 이번 여행을 결심했다. 그의 요청은 당초 이번 여행을 제안한 미콜라 스테블얀코에게 전달되었고, 이제 에드와 나는 추가 연락을 기다리고 있다.

수요일, 오전 10시 15분, 콘스탄친-예지오르나

다음 날 아침, 바르샤바 프레데릭 쇼팽 로타리클럽의 전 회장인 야첵 말레사는 우리를 바르샤바 남부의 유서 깊은 도시인 콘스탄친-예지오르나의 로타리클럽들이 설립한 난민 센터로 초대했다. 58세의 말레사는 우리와 동행하기 위해 직장을 쉬었다. 그는 로타리 자원봉사가 더 재미있다고 말한다.

  1. 폴란드 로타리클럽들이 설립한 우크라이나 지원 및 교육 센터에서 한 어린이가 놀고 있다.

    Ed Zirkle

  2. 센터 벽면이 미국 뉴햄프셔주의 학생들이 만든 파란색과 노란색 나비로 장식되어 있다.

    Ed Zirkle

  3. 센터의 한 어린이가 미술 작품을 보여주고 있다.

    Ed Zirkle

우크라이나 지원 및 교육 센터는 도심 근처의 조용한 거리에 위치한 3층 콘크리트 건물에 있다. 벽에는 미국 뉴햄프셔주의 학생들이 우크라이나 아이들을 위해 만든 파란색과 노란색 종이 나비가 산뜻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우리는 두 명의 소녀와 네 명의 소년이 큰 탁자 주위에 앉아 손 모양으로 자른 노란 종이에 눈과 코를 그리고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조금 낯을 가리는 듯 했던 아이들은 이내 우리가 반가운 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통역사들의 말을 따라잡기 위해 분투하며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아이들은 우크라이나의 키이우, 헤르손 및 하르키우에서 왔다. 말레사는 아이들이 군인으로 우크라이나에 남은 아버지를 뒤로 하고 어머니와 형제자매를 따라 이곳에 왔다고 설명한다. "정서적으로 충격을 받은 아이들은 처음에 어떤 반응도 없었고 의사소통도 하지 않았죠. 시간이 지나고 우리의 보살핌으로 상태가 극적으로 개선되었습니다."

그림 수업이 끝나자 교사가 아이들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휴식을 취했다. 근처 공원의 작은 테니스장 안에서 파란색 자켓과 '아빠 사랑해'라고 적힌 모자를 쓴 소년이 축구공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빨간 스웨터를 입은 여성이 소년에게 다가가 그를 꼭 껴안았다. 36세의 룰리아 체르카스비나는 이 소년의 상담교사고, 키이우 출신이지만 전쟁이 시작된 이래로 바르샤바에 머물고 있다. 고국에서 자폐 청소년을 상담했던 그녀는 "조국의 미래를 위해 무언가를 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에 로타리 센터에서 일하는 것에 보람을 느껴요"라고 들려준다.

6월, 센터가 문을 열기 전 로타리안들은 이스라엘의 우수한 심리치료사들을 초빙해 우크라이나 상담가들에게 아동 치료 및 상담 교육을 제공했다. 그녀는 아이들을 향해 손짓하며 "보세요, 아이들이 웃고 있어요"라고 외쳤다.

우크라이나 지원 및 교육 센터의 상담교사인 룰리아 체르카스비나가 인근 공원에서 오리를 구경하는 아이들을 지켜보고 있다.

Wen Huang

수요일, 오후 3시 30분, 바르샤바

말레사는 우리를 숲속에 자리 잡은 폴란드 전통 레스토랑으로 안내했다. 보르시 한 그릇을 먹고 나머지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말레사는 내게 휴대전화를 건네주었다. 바르샤바 프레데릭 쇼팽 로타리클럽 회장인 미칼 스쿠프였다. 그는 우리가 폴란드 마을 자모시치를 방문해 우크라이나 로타리안들을 만나고 그들과 함께 국경을 넘어 리비우까지 동행하게 될 거라고 알려주었다.

스쿠프는 한 다국적 기업의 바르샤바 사무실 법률 고문으로, 최근 난민 센터를 위한 미니밴 구입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바르샤바에서 이탈리아 투스카니까지 10일간의 자전거 여행을 마쳤다. 쇼팽의 동상 앞에서 만난 그는 내가 센터 방문에 대해 설명하자 센터 설립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려주었다.

폴란드 사람들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을 때 큰 충격을 받았고 많은 사람들이 자동차에 연료를 가득 채웠다. 스쿠프는 "아내가 짐을 꾸려 피난갈 준비를 했었"다며 "다행히도 우리의 공포는 전 세계의 많은 선량한 사람들의 친절로 진정되었죠. 그들은 클럽 웹사이트, 이메일, 전화를 통해 우리에게 연락해서 도울 수 있는 방법을 물었습니다"라고 회상했다.

미칼 스쿠프와 야첵 말레사가 바르샤바의 쇼팽 기념비 앞에 서 있다.

Ed Zirkle

그와 동료들은 전 세계 14개 로타리클럽 또는 지구의 대표들로 구성된 실무 그룹을 만들고 매주 화상회의를 열어 기금 마련과 구호 방안을 논의했다. 그는 "처음에는 전쟁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 몰랐어요"라며 "많은 난민들이 앞으로 닥칠 일을 모른채 대기 상태에 있었습니다. 저는 이 전쟁이 빨리 끝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난민을 도와야 할 거라고 생각했죠"라고 들려주었다.

9월, 로타리재단의 재해대응 보조금과 한국, 독일, 캐나다, 일본, 미국의 기업과 개인, 로타리 회원들이 보내준 기부금으로 센터를 열었다. 대부분 우크라이나 난민인 심리학자, 교사, 센터 관리자를 고용하고 훈련시켜 전쟁으로 상처를 입은 어린이와 다른 사람들에게 상담과 교육을 제공했다. 스쿠프는 "모든 것이 믿기 어려운 일"이라며 "모든 로타리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우리에게 도움을 제공했습니다. 선행의 힘은 실로 위대합니다" 하고 경탄했다.

그는 대화 중에 알렉스 레이라는 이름을 여러번 언급했다. 레이는 미국 뉴햄프셔주 플리머스 로타리클럽 회원으로, 센터에 30만 달러 이상을 기부했다. 스쿠프는 "그가 현재 우크라이나에 있어요"라며 "우리가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스쿠프도 폴리나처럼 러시아가 전쟁을 확대하면 더 많은 난민들이 폴란드에 들어올 거라고 말한다. 이를 염두에 둔 그와 로타리 동료들은 레이의 기부를 바탕으로 센터를 확장하고자 한다. 러시아와 벨로루시를 포함한 모든 난민들에게 돌봄, 직업 및 언어 훈련, 심리적 지원, 기본 의료 서비스 등 장기적 서비스를 제공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17명으로 이루어진 비교적 작은 클럽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헌신이 다른 이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어요. 곧 3명 이상의 신규 회원이 생길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는 쇼팽 기념비 앞에서 팔을 넓게 뻗고 클럽 깃발을 들고 포즈를 취했다. 그의 사진을 찍은 후 나는 1926년에 건립되었다가 1940년 독일군에 의해 파괴된 후 1958년에 복원된 그 조각상을 살펴본다. 마침 조각상 받침대에 새겨진 비문이 눈에 띈다. "화염은 우리의 역사를 삼키고, 칼을 든 도둑들은 우리의 보물을 약탈할 테지만, 우리의 노래는 지켜지리라."

폴란드의 가장 위대한 시인 중 한 명인 아담 미츠키에비치의 시 중 한 구절이지만 이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시로도 읽혀진다.

목요일, 오후 5시 15분, 자모시치

바르샤바에서 자모시치까지는 버스로 4시간이 걸린다. 구글 지도는 우리가 우크라이나 국경에서 약 60km 떨어진 곳에 있다고 알려준다. 이내 어둠이 우리를 뒤덮고 장작을 태우는 냄새가 풍겨온다. 치솟는 에너지 비용으로 이곳과 유럽 전역의 많은 집들이 벽난로와 장작 난로로 난방을 하고 있다.

자모시치는 흑해와 서부 및 북부 유럽을 연결하는 중세 무역로에 건설되었다. 이탈리아 건축가 베르나르도 모란도가 설계한 이 아름다운 도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주민들의 맹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나치에 의해 점령당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나는 최근의 위기 동안 이 마을 사람들이 보여준 놀라운 관대함과 공감에는 과거의 비극적 역사도 일부분 기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3월 뉴스 보도에 따르면 약 4,000명의 난민들이 이곳에서 피난처를 찾았다고 한다.

모란도 호텔은 이탈리아 광장을 닮은 그레이트 마켓 스퀘어 한 쪽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완벽한 광장의 주변에는 다양한 색상의 르네상스 건물이 어깨를 맞대고 서 있으며 지붕선은 16세기 건축 양식을 닮아 있다. 지르클과 나는 궁전 같은 로비로 짐을 옮기다가 스쿠프가 말한 알렉스 레이를 만났다. 레이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130만 달러를 모금했으며, 모두 우크라이나의 인도주의 프로젝트에 자금을 지원할 예정이었다. 그는 이 기부금에 자신의 돈 100만 달러를 상응 기부했다.

스티브 랜드, 레이, 자모시치의 로타리 회원 리처드 루친이 우크라이나에 입국하기 전, 폴란드 첼름에 있는 창고에서 침낭 박스들을 수거하고 있다.

Common Man for Ukraine/Steve Rand

뉴햄프셔에서 인기 있는 '커먼맨' 레스토랑의 오너인 레이는 매너가 온화하고 겸손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그는 두 번째 우크라이나 여행을 마치고 막 돌아온 참이었다. 어둡고 추운 겨울이 시작되는 상황에서(정전이 상황을 더 악화시키고 있었다) 우크라이나인들에게 가장 시급하게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한 여행이었다.

그의 40년 지기 친구이자 동료 로타리안, 철물점 사장인 78세의 랜드는 "지난 3월 러시아 탱크가 우크라이나로 진격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엄청난 위압감을 느꼈습니다"라고 털어놓으면서 "제2차 세계대전 같은 군사 작전이었죠. 더구나 모든 전쟁 무기가 스스로를 방어할 능력이 거의 없는 민간인을 상대로 사용된 데 분노를 느꼈습니다"라고 말했다.

뉴햄프셔주 플리머스 로타리클럽 회원인 두 사람은 로타리를 통해 해결책을 찾았다. 레이는 "폴란드와 우크라이나에서 로타리 네트워크를 활용하기로 결정했습니다"라며 "이 방법을 통해 우리는 기부금이 우크라이나인에게 직접 전달될 것임을 기부자들에게 확신시킬 수 있을 것으로 믿었죠다"라고 덧붙였다.

레이와 친구들은 고향에서 모금 시작했다. 그들의 노력은 지역 정치인, 라디오 방송국, 마이너리그 야구팀, 그리고 캠페인의 재정 대리인 역할을 한 Granite United Way와 같은 지역 비영리 단체의 지지를 얻었다. 레이는 또한 850명의 식당 직원을 참여시켜 손님들에게 고객에게 카드와 팜플렛을 배포하기도 했다. 레이의 파트너인 리사 뮤어는 "인구 138만 명의 뉴햄프셔에서 주민 1인당 약 1달러를 기부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습니다"라고 말한다.

알렉스 레이는 폴란드의 새로운 로타리 친구들의 무한한 관대함에 찬사를 보낸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원동력은 우리가 몸담은 조직, 로타리에서 나옵니다.”

이제 모금 활동은 뉴햄프셔 너머로 확장되고 있다. 그와 친구들은 지난 여름 폴란드와 우크라이나를 답사했고, 스쿠프과 그의 클럽이 설립한 난민 센터를 포함해 6개의 프로젝트를 확인했다. 이들은 또한 약 700톤의 음식을 구입해 자모시치의 로타리 회원들을 통해 배포했다. 이제 지원 물품에 침낭과 발전기를 추가하고 있다는 그는 자신들의 성공이 현지 로타리클럽 덕분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우크라이나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우리의 기금과 지원 물품을 적시적소에 책임 있게 전달했습니다."

이들에게 안전을 걱정하지는 않았는지 묻자 스티브 랜드의 파트너인 수잔 매티슨은 "그건 제 생애 처음으로 전쟁 지역으로 들어간 경험"이라고 털어 놓았다. "평범한 중년의 중산층 엄마"라고 스스로를 소개하는 그녀는 리비우로 떠나기 전 호스트가 폭격 소식을 전하며 여전히 가고 싶은지를 물었을 때 스스로에게 이렇게 다짐했다고 한다. "수백만 명의 우크라이나인이 매일 폭격에 눈을 뜨고,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용기를 낸다. 그들이 그 생활을 견디고 있다면, 며칠 동안 같은 경험을 한 후 그 경험을 토대로 장기적인 도움을 추구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다."

네 사람은 계속해서 우크라이나에서 본 것에 대해 설명했다. 컨벤션 센터와 구소련 시대의 군사 막사가 난민 보호소로 개조된 이야기부터 우크라이나 동부로 긴급 식량을 전달하기 위한 임시 창고, 폐허가 된 고아원 재건을 도운 이야기까지. 그리고 레이는 폴란드의 새로운 로타리 친구들의 무한한 관대함에 찬사를 보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원동력은 우리가 몸담은 조직, 로타리에서 나옵니다."

뉴햄프셔에서 온 4인조가 자모시치의 호텔에서 지도를 보고 있다. 왼쪽부터 수잔 매티손, 랜드, 레이, 리사 뮤어.

Ed Zirkle

10월에 있었던 여행으로 이들은 우크라이나에 닥쳐올 강추위, 특히 어린이들의 겨울나기에 대한 걱정이 커졌다. 레이와 친구들은 12월 중순에 우크라이나에 다시 가서 18톤의 음식과 1,000개의 침낭, 24개의 발전기, 1,300개의 크리스마스 선물 패키지를 리비우와 리브네 시의 고아원에 전달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오자마자 전화가 울렸다. 바르샤바-벨베데레 로타리클럽 회장인 표트르 파이도프스키다. 그는 내게 두 명의 로타리안이 아침에 호텔에 도착해 나와 사진기자를 데리고 국경을 넘을 거라고 알려준다.

이튿날 오전 9시, 바실 폴론스키와 헤나디 크로이치크가 호텔 로비로 걸어 들어왔다. 마침 로비에서는 뉴햄프셔에서 온 4인조와 자모시치에서 온 로타리 회원이 체크아웃을 위해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로타리에 대한 언급만으로도 로비에 모인 낯선 이들 사이에 언어나 문화적 장벽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우리는 오랜 친구처럼 서로 따뜻하게 인사를 나누고 가방을 바닥 위에 팽개쳐둔 채 대화에 열중했다. 우크라이나로 출발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 기사는 로타리 영문 잡지 2023년 2월호에 실렸던 것입니다. 3월호에서 웬 황은 우크라이나의 문화 수도이자 포위된 도시 리비우를 방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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