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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의 젊음

홀거 크나악은 미래의 로타리에 대한 참신한 비전을 갖고 있다. 친구들의 도움에 힘입어, 모든 일은 순조롭게 흘러갈 것이다.

라체부르크의 네 호수 중 하나인 쿠헨지 호수는 홀거의 누이 바르바라(왼쪽)과 수잔의 자매 자비네(오른쪽)와 함께 하는 점심에서 아름다운 배경이 되어준다.

홀거 크나악이 진공청소기를 돌리고 있다.

헤르조그툼 라우엔부르크-묄른 로타리클럽은 12세기 건축물인 라체부르크 성당의 수도원에서 매년 여는 크리스마스 자선장터 행사를 마무리했다. 수공예품, 겨우살이 장식, 수제 케이크와 쿠키를 이틀 간 판매해 약 8,000유로를 모금했다. 올해의 모금액은 중증소아환자를 지원하는 독일의 비영리단체에 기부할 예정이다. 클럽 회원들이 부스를 철거하고 테이블과 의자를 정리하는 동안 홀거는 진공청소기를 잡아 들고 바닥의 과자 부스러기, 먼지, 반짝이 조각을 제거하느라 분주하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국제로타리 차기회장인 홀거는 2020 7 1일 회장 취임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동시에 클럽에 몸을 담은 지 27년이 되는 평범한 로타리안으로서 여느 회원들처럼 판매에 참여했다. "그는 여러 친구들 중 하나가 되기를 바랄 뿐이죠." 클럽 회원인 바르바라 하트콥이 말한다.

독일어에는 'man holt die Leute ins Boot'라는 표현이 있다. '사람들을 한 배에 태우고 공동의 목표를 향해 함께 협력한다'라는 의미다. 한 해 동안 로타리안들은 홀거 크나악이 다른 사람이 일할 동안 그저 옆에 서 있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홀거에게는 열심히 일하 것만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도 중요하다. 그는 올해 모든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을 참여시키는 데 주력한다는 그의 최우선순위에 집중 것이고,동시에 모든 사람들이 즐거움을 느끼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이것이 홀거의 기본 원칙입니다." 그의 오랜 친구이며 동료 클럽 회원인 후버투스 아이히블라트 말한다. "우리가 함께하는 이상 즐겁지 않은 일은 없습니다."

2020-21 국제로타리 회장 홀거 크나악. 그의친구는 그는 젊어 보여요. 젊음이넘치죠라고 말한다.

홀거 크나악은 전형적인 로타리 회장이 아니다. 청바지를 입고, 대부분의 경우 넥타이를 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국제로타리의 첫 독일 출신 회장이며, 전통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회장직까지 올라왔다. 많은 전임자들과 달리 그는 여러 로타리 임원직을 단계적으로 밟지 않았다. 그는 클럽 회장과 지구총재를 역임했으나 RI 이사가 되기 전에 맡았던 국제로타리 업무는 연수리더 한 번뿐이었다. 그는 로타리 연수회에서 사람들로부터 지구총재가 되기 전에 다른 지구 임원 역할을 한 적이 있는지 질문을 받았던 일을 기억한다. "저는 없다고 말했고 다들 매우 놀랐습니다."

홀거는 로타리 청소년교환 프로그램에 대한 헌신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는 홀거와 아내 수잔에게 깊고 풍부하며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경험을 선사했다. 크나악 부부에게 자녀 없지만 그들은 수십 명의 학생들에게 집과 마음을 활짝 열어주었다. "홀거의 집에는 항상 사람이 가득했고, 특히 젊은이들이 많았죠." 친구이 같은 클럽 회원인 헬무트 크노트가 말한다. "그들은 수 년간 수백 명의 학생들을 맞이했습니다."

1992년 로타리클럽에 입회하자마자 홀거는 독일 북부에서 단기 청소년 교환학생을 위한 캠프를 돕게되었고 즉시 프로그램에 매료되었다. "정말 훌륭한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말한다. "독일어로 'wo dein Herz aufgeht( 마음이 열린다)'라고 말할 만한 일이었. 젊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내 인생에서 최고의 시간이었어요'라는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때로 자기 자신에 대해, 즉 로타리를 통해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고 자신에게 어떤 가능성이 열려 있는지에 대해 놀라는 것처럼 보입니다."

홀거에게도 그러한 기회들이 열렸다. 그는 클럽의 청소년교환 위원장이 되었고 2006-07 1940지구 총재를 역임한 후 독일 다지구 청소년교환 위원장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는 2013년 로타리 이사 임기를 시작하기 전날까지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그 과정에서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 의지했음을 밝혔다. "우리는 함께 비전을 수립하고 함께 앞으로 나아갑니다." 말한다. "사람들은 각자 조금씩 다른 길을 가고 있죠. 하나의 길이 있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그러나 도착점은 같아야 합니다."

젊은이들은 홀거의 행동 방식을 본능적으로 이해하는 것 같다. "홀거에게는 비전이 있고, 그 비전을 실천에 옮깁니다." 베를린 로타랙트클럽과 베를린 인터내셔널 RC의 회원인 브리타니 아서가 말한다. "그건 그에게 새로운 비전이 아닙니다. 홀거와 수잔은 청소년교환 학생 수십 명을 호스트해왔어요. 그 이유가 2020년에 '우리는 젊은이들에 투자해야 한다'라고 말하기 위해서였을까요? 아닙니다. 그게 그 부부의 본모습이에요."

브리타니 "경험이 아니라 잠재력"에 투자하려는 홀거의 의지를 특별하게 생각한다. 2012년 호주 친선사절 장학생으로 독일에 왔던 그녀는 클럽 모임에서 홀거와 잠시 대화를 하게 되었다. 그 만남은 그녀가 2012-13년 다나카 사쿠지 RI 회장이 주최한 베를린 평화 포럼에서 자신의 '결정적인 로타리 순간'에 대해 말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브리타니는 발표 후 자신이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평화 포럼을 조직한 후 로타리 연수회를 준비하고 있던 홀거에게는 다른 아이디어들이 있었다. "제가 수백 명의 로타리안 앞에서 발표를 마쳤을 때였어요." 그녀는 당시를 회상한다. "저는 기분이 매우 좋았습니다. 그때 그가 '연수회 일을 돕지 않을래요?'라고 물어서 저는 '좋아요!'라고 답했습니다."

다른 로타리안들처럼 브리타니는 홀거의 설득력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매우 재미있고 친절하지만 특정한 주제에 대해서는 극도로 진지해요. 상당히 흥미로운 리더입니다. 당신이 그를 필요로 할 때 다양한 측면에서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요."

"그는 매우 재미있고 친절하지만 특정한 주제에 대해서는 극도로 진지해요. 상당히 흥미로운 리더입니다."

홀거와 수잔 부부는 여행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평생을 고향 근처에서 살아왔다. 수잔은 라체부르크에서, 홀거는 함부르크에서 북동쪽으로 약 65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라체부르크 근처의 마을 그로스 그뢰나우에서 태어났다. 그들의 성장 배경은 놀라울 정도로 비슷했다. 둘은 모두 1952년 태어나 가족이 경영하는 가게 건물에서 살았다. 수잔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소시지를 만들었고 홀거의 가족은 1868 5대조 할아버지가 창립한 빵집을 가업으로 잇고 있었다. "우리는 많은 사랑을 받으며자랐습니다." 홀거 회상한다. "모두가 서로를 챙기고 누가 어디에 있는지 항상 알고 있었죠.”

후버투스 아이히블라트도 역시 라체부르크에서 성장했고, 결혼 전 성이 호르스트였던 수잔은 그의 누나와 어린 시절 친구였다. "수잔의 집은 매우 개방적이었고, 홀거의 집도 마찬가지였죠." 후버투스가 말한다. "언제나 친구들이 홀거의 집을 오고갔습니다."

홀거와 수잔은 한때 수잔의 할머니가 살던 집에 살고 있으며, 바로 옆에 있는 수잔이 자란 집에는 이제  수잔의 자매인 자비네살고 있다. 그리고 홀거의 누이 바르바라는 약 10년 전에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같은 집의 꼭대기층으로 이사를 왔다. 두 집에는 합해서 9개의 손님방이 있는데 바르바라의 손주 12 청소년교환 학생, 다양한 친구들의 방문으로 보통 한 개 이상의 손님방이 사용 중.

아침이면 모두가 홀거 부부 거실 구석의 아늑한 공간에 모여 커피를 마신다. 마루에서 천장까지 연결된 창문은 라체부르크를 둘러싼 네 개의 호수 중 하나인 쿠헨지의 풍경을 거실로끌어들인. 그들은 종종 함께 점심을 먹고, 또 커피를 마신다. 홀거는종종 수잔, 바르바라, 자비네가 계속 담소를 나누는 동안 긴 몸을 작은 소파에 누이고 낮잠을 . "그는 낮잠을 자면서 우리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해요." 자비네가 말한다.

네 명은 장보기와 요리 등의 가사를 함께한다. "무언가가 필요한 사람은 크게 외치기만 하면 됩니다"라고 홀거가 말했다. "저는 '함께'가 완벽한 생활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모든 의 비결은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 묻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원하는 그대로 살고  있습니다."

12월의 어느 토요일, 홀거, 수잔, 바르바라, 자비네는 다음날 있을 크나악 부부와 친구들 23명의 저녁 파티를 위해 뵈프 부르기뇽을 준비하고 있다. 동시에 크리스마스 파티 메뉴도 구상하고 있다. 그때는 15명을 초청할 예정인데, 만약 독일로 공부하러 온 이집트 여학생이 참석한다면 16명이 될 것이다. 그녀는 크나악 부부가 샤름 엘 셰이크의 연수회에서 알게된 로타리안들의 딸이다.

헬무트 크노트는 손님을 친절하게 맞이하는 크나악 부부의 자세가 "로타리에게는 뜻밖의 행운"이라고 말한다. "적어도 1년에 한 번 우리는 크나악 부부의 아름다운 정원에서 파티를 즐기고 날씨가 좋으면 수영도 합니다. 겨울에는 홀거의 생일을 맞아 전통적으로 여는 행사가 있습니다. 조정클럽에서 모인 후 호수 주변을 하이킹하는 것입니다." 생일선물로는 모두 홀거가 조정클럽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한 카를 아담 재단에 기부를 한다. (라체부르크의 조정클럽은 세계적 명성을 떨친 바 있다. 조정클럽의 회원들은 1960, 1968, 2000, 2004, 2012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독일 대표팀의 핵심 선수들이었다. 조정클럽의 공동창립자이자 오랜 트레이너이며 지역 고등학교 교사인 카를 아담은 '라체부르크 스타일'로 알려진 기법의 창시자로, 역대 최고의 조정 코치로 손꼽힌다.)

12월 헤르조그툼 라우엔부르크-묄른 RC의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과일펀치를 마시며 홀거가 동료 클럽 회원인 바르바라 그녀의 남편 게리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뒤의 인물은 얀 슈메데스). 

가족사진 앨범을 보며 크나악 부부는 어린 시절 바닷가에서 보낸 휴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홀거의 가족은 북해의 질트섬으로, 수잔의 가족은 발트해 연안으로 휴가를 갔었다. 홀거의 가족은 집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큰 정원이 있는 작은 별장에서 주말을 보내곤 했다. 그는 숲과 목초지 탐험을 즐겼다. "완벽한 유년시절이었죠." 그가 말한다.

홀거가 어릴 때 살던 집에서 약 500미터 거리에는 동독과의 경계를 가르는 작은 강인 바케니츠 강이 흐른다. "제게 그 강은 진정 세상의 끝이었습니다."그가 당시를 회상한다. 여름에 그는 친구들과 강을 헤엄쳐 건너며 용기를 시험하곤 했다. 강 건너편에는 늪지, 지뢰밭과 동독 보초들의 감시탑이 있었다. 그는 19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후 "친구들과 처음으로 한 일이 자전거를 타고 강 건너편을 누빈 것"이라고 말한다. "모든 감시탑이 개방되었습니다. 감시탑에 올라가 우리 마을과 우리 집을 조망할 수 있었죠."

청년이 된 홀거는 휴일과 주말에 가족이 운영하는 베이커리의 운전기사로 일했다. 고등학교를 마친 후에는 2년간 다른 베이커리에서 도제식 교육을 받으며 기술을 배울 수 있었다. "그래서 저는 다양한 빵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가 들떠서 말한다. "그리고 아직도 빵을 굽습니다. 자신이 하는 일을 사랑해야만 그 일을 잘할 수 있어요. 어떤 마케팅 기법을 사용하든 결국 중요한 것은 품질입니다. 제품을 사랑하고, 최고의 제품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죠.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시간을 들여야 합니다. 이것은 많은 분야에 적용되는 비결이기도 해요."

도제식 교육을 마치고 슈투트가르트의 큰 빵공장에서 인턴으로 1년을 보낸 후 그는 킬이라는 도시에서 경영학을 공부했다. 처음 참석한 학생회에서 장래 그의 아내가 될 사람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수잔을 처음 본 날은 1972 9 20일이었습니다." 그가 말한다. "그 순간이 선명하게 기억이 납니다."

홀거와 수잔은 요리하는 것을 즐긴다. 이 사진에서 그들은 홀거 누이의 주방에서 식사를 준비하고 있다

수잔은 홀거를 그 정도로 눈여겨 보지 않았다. 학급에 남학생은 94명이었고 여학생은 단 3명밖에 되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둘은 곧 친해졌고 주말마다 각자의 집에서 부모님 일을 돕기 위해 함께 차를 타고 다녔다. 일요일 저녁마다 그들은 크나악가의 빵과 호르스트가의 소시지를 차에 싣고 킬로 돌아왔다. "친구들은 월요일이 되면 항상 우리를 찾아왔죠." 수잔이 웃으며 말한다.

그들은 1975년에 졸업을 했고 다음해에 결혼을 했다. 그들은 각자의 가족 사업에서 계속 일했다. 당시 베이커리는 여러 매장과 50여 명의 직원을 두고 있었다. 1970년대 후반 아버지로부터 사업을 물려받은 홀거는 회사를 확장하기로 결심했다. 또한 그는 빵의 재료로 쓰는 곡물을 신뢰할 수 있는 곳으로부터 공급받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그는 농업협동조합을 결성했던 친구 후버투스 아이히블라트의 도움을 받았, 유럽 최대 안경 체인의 소유자이자 유기농 곡물을 경작하려는 계획을가지고있던 군터 필만과도 함께 일했다. 홀거와 필만은 직접 제분소를 세우고 30년 전에는 매우 새로운 개념이었던 유기농 빵을 판매했다. "홀거는 언제나 매우 혁신적이고 미래지향적이었어요." 아이히블라트가 말한다.

이어서 홀거는 매장에서 직접 빵을 굽는다는 또 다른 혁신을 실현했다. 그 전까지는 공장에서 빵을 구워 매장으로 이송하는 방식이 전부였다. 홀거의 아이디어는 공장에서 반죽을 만든 뒤 냉동 상태로 매장으로 배송해 매장에서 빵을 굽게 하는 것이었다. 그의 모토는 'Der frische Bäcker(신선한 빵집)'이었다. 이제는 독일의 거의 모든 베이커리가 이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홀거는 계속 사업을 확장했고 매장 수는 약 50, 직원은 수백 명으로 성장했다. 그는 제빵업에 투자하는 다국적 기업으로부터 매우좋은조건에 회사 매각 제안을 받았다. 회사를 매각하고서도 여전히 40대의 젊은 사업가였던 그는 창업 활동을 하면서 골프를 시작했다(그는 곧 자신이 속한 골프클럽의 회장이 되었다). 40세 이하 청년들의 단체인 '라운드 테이블'에 적극 참여하기도 했고, 39세에 근처 마을 묄른의 로타리클럽에 가입했다(곧이어 라체부르크에 신생클럽이 창설되었지만 그는 여러 친구들과 함께 묄른 클럽에 남았다). 그리고 머지않아 로타리 청소년교환이 자신의 소명임을 깨달았다.

라체부르크의 12세기 성당과 빙하호수 

고대 성당과 부르주아 목골주택이 특징인 중세도시 라체부르크는 네 개의 빙하호수로 둘러싸인 섬에 위치해 있다. 독일 북부의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에는 호수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굽이진 도로를 타고 가다보면 푸르른 언덕을 지나고 지역 특유의 벽돌 건축이 눈에 띠는 농장과 마을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홀거와 수잔의 집에 머물던 학생들에게 엽서 그림같은 독일의 풍경보다 훨씬 더 강렬하게 기억되는 경험이 있다.

유라이 드보르자크는 1996년 크나악 부부가 처음 호스트한 학생들 중 한 명이었다. 당시 16세였던 드보르자크는 본국인 슬로바키아로 돌아가 홀거와 수잔에게 카드를 보냈고, 부부는 그를 다시 독일로 초대했다. 그러나 드보르자크의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자 그는 부부에게 갈 수 없다는 소식을 전했다. 홀거와 수잔은 드보르자크에게 어머니를 모시고 독일로 오라고 설득했다.

 "저는 크나악부부와 한 달을 함께 보냈고 그들은 저를 돕기 위해 성심성의를 다했습니다." 드보르자크가 회상. "이후로 우리는 가까운 친구가 되었어요. 제가 홀거와 수잔 만나지 못했다면, 그리고 그들이 삶의 많은 측면에서 저의 멘토가 되지 않았더라면 지금과 같은 일을 이루지 못했을 것입니다." 드보르자크는 현재 빈에서 사모펀드 회사를 운영하고 있지만 그가 물질적 성공에 대해 말한 것은 아니다. "돈이 아니라 얼마나 건강한 인격을 갖추게 되었냐는 측면에서, 저는 아무것도 없던 상태에서 지금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홀거와 언제나 깊은 대화를 나눕니다." 지금도 매년 그를 만나러 가는 드보르자크가 말. "그는 제게 돈이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며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삶을 즐겨야 한다고 말했어요. 또한 여행을 하며 세상을 봐야 한다고 말했죠. 그의 친구들과 로타리안들이 있는 모임에 저를 데려가기도 했습니다. 당시에는 이해 못 했지만 나이가 들면서 잘 모르는 사람들과 잘 지내는 법을 배울 수 있는 매우 드문 기회였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는 저를 성장시켰습니다."

그는 홀거와 수잔에 대해서 이렇게 . "그들은 넓은 마음과 강한 책임감으로 많은 사람들의 멘토가 되어주었어요. 다른 사람들과 다릅니다. 말하자면 챔피언십 리그에 있는 것과같죠."

크나악 부부는 학생들에 대한 멘토링 책임을 진지하게 생각한다. "청소년교환의 중요한 목표는 다른 문화에 뛰어들어 그 문화에 대해 가능한 모든 것을 배우는 겁니다." 홀거가 말. "청소년교환의 놀라운 점은 부모가 아이들을 세계 각국으로 보내면서 로타리안들이 그들을 자신의 아이처럼 돌봐줄 것이라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고유함을 만드는 무기가 되죠. 그 어떤 봉사단체도 이러한 방식을 시도한 적이 없어요."

파울라 미란다는 2008년 교환학생으로 있을 때 첫 호스트 가정 중 하나로 크나악 부부의 집에서 3개월을 지냈다. 그녀는 1 아르헨티나를 떠나 라체부르크에 도착했다. "그때가 오후 4시였는데 독일은 그 시간에 이미 깜깜했죠. 도대체 내가 어디에 있는 건가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독일식 식사로 저를 환영해주었습니다."

"그는 제게 돈이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며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삶을 즐겨야 한다고 말했어요."

미란다가 한 달 후 19세가 되자 홀거와 수잔은 그녀가 학교에서 사귄 친구들을 초대해 생일파티를 열어주었다. "그들은 아르헨티나방식의 바베큐(아사도)를 만들어주었어요." 그녀 회상. "그들은 제가 그곳을 집처럼 편안히 느끼길 바랐고 저는 그 점을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들이 아니었다면 제가 보낸 한 해는 절대 그와 같지 않았을 거예요. 저는 정말 그들을 사랑합니다."

1870지구의 전총재인 알로이스 제르바티는 25년 전 독일 다지구 청소년교환 컨퍼런스에서 크나악 부부를 처음 만났다. "홀거와 수잔은 명쾌하고 열린 태도로 젊은이들을 이끌고 그들에게 동기를 부여하죠." 그가 말. "만나는순간 그들이 젊은이들을 좋아한다는 것을 즉시 알 수 있어요. 홀거는 로타리가 반드시 젊게 유지되어야 하며, 젊은이들을 위해 일하고 그들과 함께 협력하는 것이 우리 모두를 젊게 만든다생각합니다."

드보르자크도 이에 동의한다. "나는 홀거와 12월에 만났고 그는 24년 간 변함없는 모습이에요. 아마 주름이 약간 늘었겠지만 다른부분은 여전히 그대로죠. 청소년교환 프로그램이 그에게 활력을 불어넣고 있거든요."

 

독일 로타랙터들을 만나면 'auf Augenhöhe begegnen - 상대와 눈높이를 맞추다'라는 표현을 종종 들을 수 있다. "모두가 평등하며 같은 조건에 있다는 의미죠"라고 수잔 설명. "누군가가 이사든 운전사든 전혀 달라질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함께 논의를 하, 상대방에게 명령한다는 느낌을 주지 않으면서 해결방안을 제시해야 하죠."

홀거의 친구들과 가족에 따르면 그에게는 이에 대한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 "그는 혼자 할 수 없는 일이 있으면 능숙하게 그 일을 위임할 수 있어요"라고 수잔이 웃으며 말. "어떤 일을 누가 잘할지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이 있이죠. 홀거의 재능이에요."

수잔은 베를린에서 열린 로타리 연수회에서 그가 로타랙터들을 성공적으로 참여시켰던 사례를 떠올렸다. "로타랙터들이 분과세션을 담당하겠다고 하자그는된다고하지않고그렇게하자고 답합니다. 그는 사람들을 신뢰하고 그들이 성공할 것을 믿거든요. 하지만 언제나 뒤에 머물며 여러 일을 챙기죠. 함부르크 세계대회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홀거와 안드레아스 폰 묄러는 2019 호스트 조직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았다. "그때도 많은 로타랙터들이 참여했어요."

"우리는 우리의 로타리클럽과 클럽의 친구들을 아껴야 ."

수잔은 홀거의 주요 목표 중 하나가 앞으로도 로타리와 로타랙트를 더 가깝게 만드는 일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바를 기대하고 있고,들떠 있어요." 수잔의자매인자비네는홀거가 무언가에 대해 들떠 있을 때 "다른 사람들도 함께 들뜨도록 만들 수 있"말한다. 브리타니 아서는 이에 대해 "사람들은 자신이 그의 비전에 투자하고 있다고 느낍니다"라고 말.

라체부르크 지호프 호텔의 볕이 잘 드는 카페에서 홀거의 친구들인 후버투스와 헬무트,옌스우베, 안드레아스페터가 반짝이는 쿠헨지 호수를 바라보며 카푸치노를 마시고 있었다. 홀거와 마찬가지로 모두 헤르조그툼 라우엔부르크-묄른 RC 회원인 그들은 홀거가 자원봉사자들을 결집시키는 천재적인 감각을 가졌다는 데 동의. 홀거의 지구총재 임기 동안 지구 사무총장이었던 안드레아스말한다. "예전의 다른 총재들은 항상 '누가 이 일을 하시오' 또는 '누가 이 일을 할 겁니까'라는 태도였죠. 그러나 홀거는 매우 구체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후버투스, 내가 이 일에 대해 생각을 해본 결과 자네가 이 일을 할 수 있는 완벽한 사람이야. 구상은 이. 이 일은 자네가 가장 잘할 수 있으니 일을 해줬으면 좋겠어. 그렇게해준다면정말기쁠거야!' 이렇게 말하면 거절이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그가 일을 던져놓고 가버릴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일을 기꺼이 하게 되죠. 러면그는얼마 뒤에다시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후버투스, 모든 일이 잘 되고 있나? 가 도울 일은 없?' ”

후버투스는 웃으면서 홀거의 성공 비결은 전파력이 강한 그의 열정에 있다고 강조했다. 그가 직접 모범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의 긍정적인 성격이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기 때문에 쉽게 사람들설득할 수 있습니다."

홀거의 친구들은 그의 훌륭한 자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그가 무언가에 기분 나빠한 적이 전혀 없었다는 다른 사람들의 경험에 동의했다. 하지만 그의 가까운 친구들인만큼 그들은 그가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고 주장. "우리는 약점을 한 가지 찾아야 해요"라며 골똘히 생각하던 후버투스는 한 가지 결점 아닌 결점을 생각해냈다. "그는 패션에 매우 민감하죠. 그의 안경을 생각해보세요!”

홀거의 개성 있는 안경이 언급되자 친구들이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런 안경을 쓰는 사람은 홀거밖에 없어요." 안드레아스가 말. "그 안경이 부러져도 문제가 없어요. 그에게는 똑같은 안경이 하나 더 있거든요.

 "그 안경은 그의 트레이드마크죠." 헬무트가 덧붙. "다른 안경을 쓴 모습을 본 적이 없. 넥타이를 매는 일 드물어요. 항상 청바지 차림이죠. 그는 젊어 보여요. 젊음이 넘쳐요!" 카푸치노 잔을 비우던 그의 오랜 친구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크게 웃었다.

크나악 부부는 야외 활동을 즐기는 활동적인 사람들이다. 홀거와 수잔이 자전거를 타다가 라체부르크 지역역사박물관 앞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얼마나 열심히 일하든 언제나 즐거워야 한다는 홀거의 철학은 특히 로타리에서 빛을 발했다. "여러 지역을 여행하며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일은 그가 정말 즐기는 일이에요." 함부르크 커넥트 e-클럽의 창립회원이기도 한 수잔 . "그는 로타리를 재미있어 하, 저도 마찬가지예요."

홀거는 모든 사람이 로타리를 즐기고 로타리의 일원임을 자랑스러워하기를 바란다. "우리 모두는 로타리를 사랑합니다.우리는 로타리를 더욱 강력한 단체로 만들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해요." 주장. "더 많은 일을 하는 것은 어렵지 않아요. 자신의 클럽에 적극 참여하고, 친구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갖고, 프로젝트와 프로그램에 더욱 많이 참여하면 됩니다.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우리의 클럽이 청소년봉사에 참여하고 있는가?', '모금을 위한 더 나은 아이디어는 없을까?' 또한 클럽은 사람들 환영받는 느낌 자부심을 느끼도록 해야합니다. 로타리안이 되어 특별한 기분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는 다가올 한 해를 생각하면서 로타리 회장이 지구대회를 포함해 많은 행사에 초청을 받지만, 대부분 대리인을 보낸다는 점에 대해 언급한다. 그러나 홀거는 온라인으로 열리는1940지구의 지구대회에 참가할 예정이다. 올해 1940지구 총재는 헤르조그툼 라우엔부르크-묄른 RC의 회원인 에드가 프리드리히다. "소속 지구의 행사에는 예외를 적용해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지구총재가 제가 소속된 클럽 출신인 경우에는 특히 그렇고요." 홀거가 말. "자신이 소속된 로타리클럽은 매우 중요합니다. 로타리에서 어떤 자리에 있든,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있든, 결국 우리는 언제나 자신이 소속된 로타리클럽의 회원이며, 친구들 속에서 행복함을 느끼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로타리클럽과 클럽의 친구들을 아껴야 합니다. 내가 회장이건아니건 결국 친구들과 함께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 더 로타리안 잡지 2020년 7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